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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함이 속마음에 있는 사람은 정신이 밖으로 발동됩니다
미즈마 도시타카

김규태 화백의 경력이나 미술적 측면은 각 전문 분야의 여러 선생님들이 이 도록에서 집필해 주시기로 되어 있으므로 서두에 해당되는 이 장(章)에서는 감상에 도움이 되도록 작품이 나오게 된 정신적 배경을 고향방문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몇 달전의 일이다. 나는 김규태 화백과 함께 그의 고향,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용산리를 방문하게 되었다. 동계올림픽의 개최 후보지인 평창군 군수와 문화 이벤트를 위한 회의를 마친 다음날, 그는 거기서 산 하나를 더 넘는 고향에 들러 30년 만에 동창생들과 재회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서쪽 끝머리에 있는 인천공항에서 동쪽 끝머리에 있는 평창군까지 고속도로로 거의 반나절, 목적지가 바로 옆이긴 하지만, 계곡을 넘는 산길은 그리 쉽지 않아서 임계면까지는 약 두어시간이 더 필요하다. 지금은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김규태 화백이 어린 시절에는 험준한 산준령을 넘는 것과, 길이 나빠 덜컹거리는 것을 비꼬아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놓고 [임계비행대]라 불렀다고 한다.
간신히 도착한 고향은 이름 그대로 계곡에 면한, 맑은 물이 용처럼 사행하는 절경의 땅이었다. 그가 다니던 분교는 이미 폐교되었지만, 고향 풍경은 그 때와 변함이 없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집도 55년 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엌을 빼면 방이 두 개 뿐인 정말로 작은 오두막이다. 여기에서 가족 십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며 다닥다닥 붙어서 잠을 잤을 것이다. 어릴 적 뛰어놀던 뒷편 월탄천에 가 보니, 놀랄 정도로 물이 맑아 개울 바닥의 돌맹이가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김규태 화백과 함께 물수제비 놀이에 빠져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 곳에 있던 우리는 한결같이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강 건너편엔 선조의 묘가 있었다. 그 곳에 이상한 비석이 있기에 가 보았더니, 씨족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했다. 일족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 생애를 바쳤기에 받았다고 한다. 김규태 화백과 그의 형이 브라질로 신천지를 찾아 이주할 때,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산을 팔아 그 자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일족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산을 팔아 버린 사실이 오히려 미담으로 받아 들여 지고 있었다. 정말로 희한한 마을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이 곳은 삼대 아리랑의 하나인 정선 아리랑의 발상지이며, 고려유신 일곱 명이 숨어들어 문화를 전파한 유서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말하면 헤이케이의 오치우도부락(도망자들이 이룬 부락)과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 곳에는 그 정신성이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 특유의, 인간 삶의 본 모습을 대자연과 더불어 창출해 온 긍지 높은 땅이었던 것이다. 김규태 화백은 이곳에서 태어나 생각이 통하는 가족들 틈에서 자랐다.
 사실 우리가 그의 생가를 방문한 것은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을 지켜온 고희를 넘긴 그의 누나는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반겨주었다. 우리가 강에서 돌아오니, 메밀부침과 더덕무침 등이 밥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우리 일행 다섯 명으로 꽉 차 버린  방에서 누님은 김규태 화백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심코 보니 수제(手製) 쟁반에 그린 남미로 보이는 작은 풍경화가 소종하게 걸려 있었다. 무성한 아마존의 골짜기에  아침해가 막 솟아오르는 소박한 그림이 이 전통가옥에는 너무도 눈에 띈다. 이 그림은 김규태 화백이 브라질로 이주하기 전에 준 것이라고 했다. 이 작은 그림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그를 떠나 보냈을 가족들의 모습이 서로 겹쳐져 눈에 어른 거렸다. 다음 스케줄을 위해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설 때, 누님은 쉰 목소리로 몇 번이나 꼭 연락하라며 눈시울을 적시셨다. 그것은 성공한 동생의 모습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솔직한 누이의 목소리였다.
 그 후 마을 회관에 불려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곳에는 100여명의 이웃 주민들이 손수 만든 요리를 수북히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화백의 동창생인 경찰 서장과 의원이 우리를 위해 갑작스럽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농협 이사, 신부, 학교 교사와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며 잔치는 무한히 흥을 돋우어 갔다. 적당한 틈을 탄  경찰서장의 선창과 더불어 남자들이 소주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술을 못하는 우리들은 재빨리 그 자리를 떴지만, 잔치는 계속 되었다고 한다.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살벌한 수도 동경에 사는 사람으로써 그것은 그립기도 하고 낯간지럽기도 하며 인간의 존재를 되묻는 것 같기도 한 체험이었다. 그 때 문득 김규태 화백의 예술의 비밀은 혹시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김규태 화백은 동양화를 안고 브라질로 이주했을까. 그리고 무엇때문에 전통적 동양화가 이렇게 까지 대변혁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여기에는 강렬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예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행복의 개념이 명확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김규태는 전진하는 것이다. 옆에서 보면 그것은 이상할 정도의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의 방향성이 닦여지면  자기 자신을 트랜스 상태로 몰아넣고, 새로운 경지로 전개시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그의 선을 놓고 세속적인 명예를 넘어선 오오쓰에(大津絵)의 경지에 근사치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를 더 말해야 겠다. [행복에의 희구]라는 사람들의 원망(願望)을 정면으로 인식하여, 그것을 직접 우주로 연결시키려는 정성된 생각의 존재인 것이다. 지나치기까지 한 정성은 동시에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지고, 태초의 외침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산출한다. 저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박력을 생각해 보라. 그래, 뉴저지 이주 후의 이번 작품에는 네이티브 인디언의 기도 까지도 목령(木靈)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최신작은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작년까지는 검은 먹색 배경에 선명하고도 강렬한 암색을 입히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이번에는 여기에다 먹이 번지게 하는 발묵기법이나 선에 의한 몰골기법등의 전통기법이 회귀되어 왔다. 이것은 정성을 쌓아올려온 자신감이 이루어낸 회귀현상이며, 김규태스타일로 부터도 해방되어 가고 있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조금 어려운 이론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물론, 김옥진 선생에게 사사하고, ITU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김규태 화백으로서는 아카데믹한 것은 충분히 체득하고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이나 거북이나 부엉이를 그리며, 때로는 진흙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하며, 테마에 따라서는 진부하다고도 볼 수 있는 테마에 정면으로 부닥친다. 그는 언제나 직구승부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우직할 정도로 직구로 다가간다. 본심에서 초래되는 압도적인 박력 앞에서는 깜찍한 지혜 같은 것은 한꺼번에 물러가 버릴 것이다. 허구로 구축된 현대사회, 그 겉발린 가면을 벗겨 내는 일은 사실 그저 단순한 정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장자의 한 구절을 그의 이번 개인전에 바친다.

진실한 것이란 정성이 지극한 것입니다.
정성되지 못하면 남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곡하는 사람은 비록 슬픈 척해도 슬프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억지로 화난 척하는 사람은 비록 엄하게 굴어도 위압을 주지 못합니다.
억지로 친한 척하는 사람은 비록 웃는다 해도 친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실로 슬픈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아도 슬프게 느껴지며
진실로 노한 사람은 성내지 않아도 위압이 느껴집니다.
진실로 친한 사람은 웃지 않아도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진실함이 속마음에 있는 사람은 정신이 밖으로 발동됩니다.

(장자 잡편 어부 제31편)

갤러리 미술세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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